기억의 껍질을 찢고 빛으로 봉합하다 — 써니킴 Sunny Kim


 

써니킴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쿠퍼 유니온 학사와 헌터 칼리지 MFA 과정을 마친 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회화를 중심으로 작업해 왔다. 그의 캔버스는 “상실과 이주가 남긴 감정을 재구성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는 평을 듣는다. 기억의 파편과 현재의 시간, 경험한 것과 상상한 것을 겹쳐 감정적 풍경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감상 포인트를 꼽자면 먼저 색의 시차를 놓치지 말자. 캔버스 한쪽에서 시작된 차가운 회색이 반대편으로 갈수록 따스한 살구색으로 바뀌고, 그 경계는 희미하게 뒤섞인다. 색이 이동할 때 생기는 ‘빛의 지진’을 따라가다 보면 둘로 나뉜 기억이 화면 안에서 잠시나마 공존하는 순간을 눈치챌 수 있다. 또 하나는 이음새다. 가까이 보면 레이어마다 시간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데, 이전 선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껍질처럼 남아 있다. 그 투명한 겹이야말로 이 작품들이 지닌 솔직함이다. 마지막으로 거리를 기억해 두면 좋다. 한 걸음 물러서면 거대한 추상 풍경이 나타나고, 한 걸음 다가서면 손끝 흔들림이 보인다. 그림이 관람자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호흡을 확장하는 과정이 바로 써니킴 특유의 리듬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리듬이 마케팅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 인상 깊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메시지를 쏟아내야 하는 업무 속에서, 그는 화면을 비워 두고 흔적을 남김으로써 더 강한 몰입을 만들어 낸다. 기능을 열거하기보다 여백을 남기는 포맷, 완벽히 편집하기보다 결을 드러내는 태도—이 모든 것이 사람을 잠깐 멈춰 서게 만든다. 결국 써니킴이 보여 준 것은, 조용한 빈칸도 충분히 스토리가 될 수 있다는 간단하고도 중요한 사실이다. 흔들리고 꺼내지고 다시 덮여도 남는 것은 결여의 울림이고, 그 울림이 우리 기억 속에서 오래 진동한다.

 

Turn Acrylic on Canvas, 100 x 125 cm, 2017

 

써니킴의 대형 캔버스를 마주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흠집’이다. 한 번에 시원하게 내려간 수직 붓질 옆에는 망설인 듯한 연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위에는 다시 새벽빛을 연상시키는 옅은 금색이 겹겹이 덧칠되어 있다. 그녀는 흔적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선과 편집 과정을 드러낸 채, 현재의 레이어를 투명하게 얹어 놓는다. 덕분에 화면은 완결된 풍경이 아니라 공사 중인 시간처럼 보인다. 멀리서 보면 장대한 추상 풍경이지만 한 발 다가서면 날것의 기억과 닿는다.

 

작가는 두 대륙을 오가며 살아온 경험을 ‘이동하는 기억의 파편’이라 표현했다. 뉴욕의 황혼 빛, 서울 골목의 안개, 유년기의 뜰에서 맡았던 흙냄새까지 서로 다른 시간이 하나의 면 위에서 중첩된다. 그런 배경 탓인지 써니킴의 색은 종종 시차를 품는다. 화면 오른쪽에서 시작된 차가운 회색이 왼쪽으로 갈수록 따뜻한 분홍으로 바뀌는데, 그 사이에는 매끈한 경계 대신 흐릿하게 번진 틈이 놓인다. 그 틈 덕분에 관람자는 자신의 기억을 끼워 넣을 공간을 얻게 된다. 작품이 거리는 넓히고 시선을 끌어당기는 방식이다.

 

써니킴, 통로, 2016, 캔버스에 아크릴, 112x138cm

 

“결여를 동반하기 위해 그린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녀가 만든 빈칸은 보기 좋게 정리된 여백이 아니라 실제 부재가 남긴 울림 같은 것이다. 어떤 캔버스에서는 흰 여백 사이로 오래된 목탄 스케치가 희미하게 비쳐 나오고, 또 다른 화면에서는 과감한 울트라마린이 어제의 회색 레이어를 그늘처럼 감싼다. 기억이 완전히 덮이지 않고, 미래가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순간—그 생경한 경계를 그녀는 집요하게 포착한다.

 

그 힘은 무음에서 나온다. 거대한 작품일수록 더 조용하고, 강한 색일수록 더 절제되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색과 선이 서로 스며드는 부분이 호흡하듯 흔들리고, 한 발 물러서면 분명히 나뉜 면들이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조립된다. 관객은 그 움직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게 되고, 결국 화면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마치 시차(時差)가 걸린 몸이 낮과 밤을 다시 학습하듯, 우리는 그녀의 회화 앞에서 감정의 시차를 조정한다.

 

써니킴, 비추다, 2017, 캔버스에 아크릴, 168x116cm
써니킴, 어둠에 뛰어들기, 설치전경, 2017

 

과거 써니킴의 ‘오늘의 작가상’ 전시는 한층 더 고요하고 밀도 높은 공간 경험을 만들어 냈었다. 전시장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가장 먼저 맞는 것은 흰색보다 약간 푸른 기가 도는 천장 조명이다. 그 밑으로 늘어선 높이 세 미터가 넘는 캔버스들은 벽에 기대기보다 몸을 세워 놓은 것처럼 관람자를 둘러싼다. 멀리서 보면 연한 회색과 옅은 금색이 얼룩처럼 번져 있을 뿐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지난 레이어들의 흔적이 겹겹이 살아 있다. 마른 붓으로 긁힌 흔적, 빗물이 번진 듯한 얼룩, 연필로 그은 선이 절반쯤 지워진 자국까지 숨기지 않고 남겨 두어 화면이 완결 대신 편집 중인 필름처럼 보였다.

 

전시장의 기온은 약간 낮게 설정되어 있어 작품 앞에 서 있으면 마치 칠이 막 말라 가는 작업실 한가운데 있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물감 특유의 희미한 향과 바닥 콘크리트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맞물리면서, 회화가 담고 있는 ‘미완성의 시간’이 현실로 전이되는 듯한 체험을 만든다. 관객들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스스로 목소리를 낮추고 호흡을 조절하며 그림 옆에 서 있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흡사 캔버스의 빈칸과 관람자의 침묵이 서로를 반사해 주는 구조다.

 

써니킴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감상 포인트는 ‘결여를 포용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흔적을 꼼꼼히 지우기보다 남겨 둔 채, 그 위에 새로운 레이어를 얹어 어제와 오늘을 한 화면에 공존시킨다. 덕분에 미완성과 완성, 기억과 현재가 동시에 확인되는 순간 화면이 진동한다. 대형 캔버스를 배치하면서도 소리와 영상, 드로잉을 리듬감 있게 섞어 긴장과 이완을 반복시킨 점 또한 돋보인다. 작품 앞에서 관람객들은 완벽히 정리된 서사보다 편집 과정이 겹겹이 노출된 무대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얻는다. 그 불완전함이 그대로 살아 있는 호흡이야말로 이번 ‘오늘의 작가상’ 전시에서 써니킴이 선사하는 가장 큰 경험이다.

 

풍경, 2014-2017, 합판에 채색, 철사, 석고붕대, 거울, 싱글 채널 비디오 루프, 43‘ 41”, 244x732x244cm, 이 작업은 2014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보여진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기획: 배은아

 

빛과 결여의 겹을 짓는 손, 써니킴

 

써니킴의 캔버스는 완결보다 편집 중인 현재를 보여준다. 한 겹의 안개빛 회색 위에 새벽빛 핑크가 번지며, 어제 남긴 연필 선이 투명하게 숨 쉬는 방식이다. 그는 흔적을 지우지 않고 덧입혀 기억과 현재가 한 화면에 공존하도록 허락한다. 멀리서는 추상 풍경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이 갈라진 틈과 망설인 붓끝이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는 그 리듬 덕분에 우리는 작품 앞에서 스스로의 결여를 조용히 들여다보게 된다.

 

 

Precipice Acrylic on Canvas, 51 x 64 cm, 2021
Turn Acrylic on Canvas, 100 x 125 cm, 2017
Standing Acrylic on Canvas, 112 x 138 cm, 2016
Well Acrylic on Canvas, 160 x 120 cm, 2017

 

마케팅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을 때도 써니킴의 작업이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메시지를 한 화면에 꽉 채우려 애쓰는 대신, 오히려 숨이 들어갈 틈을 남겨 두는 편이 사람을 오래 붙잡는다. 써니킴은 그 사실을 회화로 증명한다. 겹겹이 포개진 레이어 중 어느 하나도 완전히 지우지 않음으로써, 화면은 늘 수정 중인 초안처럼 살아 움직인다. 그러니 한 번에 이야기의 끝을 내지 않고, ‘편집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 보는 것도 좋은 전략일지 모른다.

 

전시장을 나와도 오래 남는 감정은 ‘허용’이다. 붓이 흔들려도 괜찮고, 한 줄의 선이 다시 사라져도 괜찮다는 느슨한 허용. 완벽하게 다듬어진 문장보다 약간 떨리는 한마디가 더 진실하게 다가오듯, 써니킴의 화면은 그렇게 완벽을 뒤로 미루며 인간적 결을 품는다. 현실과 환상이 맞닿은 금 간 경계, 그 안에서 흔들리며 버티는 색과 선이 우리 삶의 불완전함을 포근하게 감싸 준다. 그녀가 보여 준 이 ‘결여의 미학’은, 브랜드든 일상이든 결국 남겨진 틈에서 호흡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속삭임처럼 들린다.

 

 

출처: 올해의작가상(국립현대미술관) 및 써니킴 작가 사이트

https://koreaartistprize.org/project/%EC%8D%A8%EB%8B%88%ED%82%B4/

https://www.sunnyki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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