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감각의 스펙트럼 ― 빌 비올라(bill viola) 가 물과 시간으로 묻는 존재의 질문
비디오아트 거장 빌 비올라의 ‘Martyrs’부터 ‘Inverted Birth’까지, 물·고통·시간이 교직(交織)된 화면 속에서 인간 의식의 심층과 공감각적 체험을 필자의 시점으로 해석한다.
프롤로그 | 호수 아래, 숨이 멈췄던 그 순간
여섯 살 어린 빌 비올라는 뉴욕 북부의 호수에 빠졌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던 그는 “이곳은 새로운 세계”라 느꼈다고 회고한다. 초록빛 물결 너머에서 본 광경은 눈부시게 정적이었고, 구조하려던 삼촌의 팔을 뿌리칠 만큼 강렬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공감각적 몰입—빛, 물결 소리, 온기—는 이후 그의 모든 비디오에 든 심층 기억(trace memory) 이 되었다. 나 역시 해당 인터뷰를 읽으며, 어린 시절 강가에서 물밖 소음이 기이하게 왜곡되어 들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은 소리를 바꾸고, 시야를 푸르게 물들여 감각 간 경계를 무너뜨린다. 빌 비올라 작품의 핵심 단어 synesthesia 를 처음 실감한 순간이었다.
1. 세 가지 질문, 한 줄기 흐름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비올라는 이 고전적 물음을 50년 가까이 반복해 왔다. 그는 고통·죽음·정화 라는 삼부작적 키워드로 질문을 영상화한다. 중요한 점은, 작품 속 인물이나 액체 자체보다 관객의 내면이 prime focus(주초점)라는 것. 그의 화면을 마주한 나는 눈앞의 픽셀보다 눈밖(眼外)의 감각을 더 선명히 느끼게 된다.
1-1 현대 순교자—Martyrs (2014)
네 개의 스크린엔 흙·바람·불·물이 등장한다. 특히 물의 낙차를 정면으로 맞는 인물의 ‘버티는 시간’은 관객에게 피해 의식보다 “증인이 된 책임”을 요구한다. 미디어 홍수 시대의 나는 언제나 타인의 고통을 2차적으로 소비하는 관찰자다. 비올라는 martyr (그리스어 ‘증인’)를 빌려—목격의 윤리를 제기한다.
개인적 메모 : 로열 아카데미 전시장(런던)에서 작품과 2m 거리를 유지하라는 안내선이 있었지만, 물소리와 진동이 피부로 스며드는 느낌은 20cm 앞에서 본 듯했다. 거리보다 깊이가 문제였다.
1-2 역류하는 탄생—Inverted Birth (2014)
한 남자를 뒤덮는 검은 액체는 점차 피, 우유, 물, 안개로 변모한다. 역순으로 배열된 탄생 → 정화 → 무중(無重)의 순환. 마지막 안개 장면에서 스크린 밝기가 극단적으로 낮아지자, 관객은 서로의 실루엣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빛의 결핍이 오히려 시각적 포화를 일으킨 순간—공감각이 역전(reversal)된다.
1-3 느린 시간의 해부학
비올라는 초당 300-1000fps로 촬영한 영상을 분당 1-2fps 속도로 투사한다. 나는 처음엔 ‘느림’을 미학적 장치쯤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반복 감상 끝에 깨달았다.
“느린 동작은 고통의 해부도다.”
Slowness is an anatomy of pain.
빠른 컷 편집이 고통을 측정 한다면, 슬로모션은 고통을 거주 하게 한다. 관객이 서서히 단면을 드러내는 피부, 근육, 표정을 응시하며 스스로 내면의 상처를 만지기 때문이다.
2. 물, 그리고 공감각
물은 비올라에게 단순한 소재가 아니다. 유체(流體)는 시각·청각·촉각을 동시에 호출한다. 물방울 소리는 리듬, 온도 차이는 피부 감각, 빛의 굴절은 색채 흔들림—카메라 앞에서 서로 교직된다.
작품 | 물의 상태 | 공감각 효과 |
The Reflecting Pool (1977-79) | 고여 있는 물·점프 후 정지 화면 | “소리가 멎은 빛” 같은 시각적 정적 |
Five Angels for the Millennium (2001) | 수중 역재생 영상 | 인간 움직임이 ‘심장 박동’처럼 울림 |
Ocean Without a Shore (2007) | 파도소리+IR 촬영 | 적외선 빛이 ‘피부를 얼음처럼’(관객 후일담) |
체험 노트 : 2018년 MOCA LA 전시에서 Five Angels를 본 후 20분간 의자에 못 박혀 있었다. 수면을 뚫고 상승하던 인물이 역재생으로 곧장 물속으로 낙하하는 장면에서 심장 리듬이 붕괴되는 기분—나는 실제로 한 박자 심호흡을 놓쳤다.
3. 비올라가 말하는 ‘순교’와 현대 미디어
비올라는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순교자(증인)로서 미디어 앞에 서 있다”고 말한다. 24시간 뉴스, SNS 라이브, 단두대처럼 흘러내리는 피드 속에서 우리는 정보 과잉에 의한 무감각(desensitization)을 겪는다.
그는 이를 역(逆)순교라 정의한다. 순교자는 신념을 위해 고통을 선택하지만, 현대인은 신념 없이 고통을 소비한다. 비올라의 거대한 스크린은 이 모순을 느린 영상으로 확대해 우리의 무관심에 상처를 낸다.
4. 공감각적 시청법 | 내가 체득한 ‘세 가지 자세’
호흡을 들여다보기
- 작품 속 물소리·숨소리에 호흡을 맞춘다. 페이스가 느려질수록, 화면 외부의 잡음이 소거되고 내 신체가 서사로 편입된다.
시선을 분배하기
- 스크린 중앙보다 화면 모서리·배경 색의 미세한 변화에 집중한다. 주변부가 때로 서사를 반전시키는 ‘두 번째 내러티브’를 품는다.
물성의 감각화
- 전시장 공기를 오른손등으로 느껴본다. 영상 밝기 변화에 따라 피부 온기가 달라지는 지점을 관찰하면, 시각과 촉각의 동시적 반응을 경험한다.
5. 테크놀로지와 영성(靈性)의 접점
비올라는 소니 PortaPak 시절부터 VR 전시까지 최신 기술을 적극 수용해 왔다. 그러나 그에게 장비는 목적이 아닌 도관(導管)이다. 하드웨어 스펙을 강조하기보다 “기술은 인간 의식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연장선”이라 설명한다. 이는 미디어 아트를 소모성 테크놀로지 데모로 축소하는 많은 작품들과 그를 구분 짓는다.
- VR·AR 대신 선택한 4K 프로젝션 : 고해상도·저프레임 재생은 필연적으로 ‘느린 몰입’을 요구한다. 비올라는 속도보다 농도를 택한다.
- IR 적외선 카메라 활용 :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파장을 기록해 '보이지 않는 감각’을 물리적 이미지로 치환한다.
6. 에필로그 | 나의 프레임은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
전시관을 나오며 비올라의 한 문장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내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를 기대하고 있다.
운이 좋다면 내 프레임이 무한히 확장되었을 테니까.”
삶의 매 순간, 우리는 자기만의 프레임(지각의 경계)을 넓히거나 좁히며 산다. 빌 비올라의 영상은 그 경계를 조용히, 그러나 거대하게 밀어낸다. 물의 격류처럼, 고통의 압력처럼, 혹은 안개와 같은 연무처럼.
글을 마무리하며 커서를 멈췄다. 화면 밝기는 일정하지만, 내 시야는 조금 더 어두워지고 동시에 더 깊어졌다. 어쩌면 이것이 비올라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다가서는 첫 숨일지도 모른다.
참고 및 감상 팁
- 국내 / 해외 전시 정보 : 코로나19 이후 전시 스케줄이 빈번히 변동되니, 작가 공식 사이트와 각 미술관 SNS를 동시 확인할 것.
- 리딩 텍스트 : John G. Hanhardt, Bill Viola: Moments in Time (Thames & Hudson, 2022) — 작품별 제작 기술과 사상적 배경을 세밀하게 다룬다.
- 사전 감상 : YouTube 공식 채널 Bill Viola Studio가 공개한 2-3분 스틸 영상은 전시장 체험을 예열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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